2001년

 
2001년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형의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가족이 다 같이 이사를 갔고, 나도 따라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새 학교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이 해의 기억은 겨울부터 생각난다. 연초 겨울에 버줌Burzum을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음악을 찾아서 듣는 청소년이 아니었다. 형이 듣던 음악을 옆에서 따라 듣고, 시디를 테이프에 복사해서 워크맨으로 듣곤 했다. 그래서 어떤 밴드들은 어떤 경로로 듣게 되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이것도 2000년 겨울인지 2001년 겨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버줌의 3집 Hvis Lyset Tar Oss를 특히 좋아했다. 백골이 된 나그네가 길가에 누워있고 까마귀들이 그 주변을 날고 있는 회색빛 커버 그림이 아주 근사했다. 테오도로 키텔센 Theodor Kittelsen의 작품들인데, 당시엔 그림의 작가가 누군지 몰랐고 다만 앨범 자켓의 몇 안 되는 단서들을 통해 음악을 상상하며 듣기 좋았다. 뭔가를 처음 녹음한 것도 이 앨범 때문이었다. 명작이지만 단순했고 녹음 퀄리티도 조악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전학을 가기 전, 중학교 1학년 때 같이 음악을 듣던 H라는 친구가 있었다. 이 친구와 함께 학교 근처에 있었던 신중현의 스튜디오에 무작정 찾아갔었다. 놀랍게도 신중현이 직접 레슨하는 코스가 있다고 했다. 여성 제자 둘이서 상담을 해줬고, 희끗한 민머리의 그가 스튜디오 안쪽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나는 신중현의 음악을 찾아서 듣게 되었지만 이때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수강료가 비싸서 부모님의 반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이 스튜디오에서 정말 음악을 배웠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전학간 후 이 친구와는 연락처가 없어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내게는 부모님을 졸라서 생긴 국산 Axtech 연습용 기타와 낙원상가에 혼자 가서 처음 구입한 중고 보스 메탈존이 있었다. 기타는 전학가기 전 동네의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서 잠시 배웠지만 가르치는 교회 형이 의욕을 잃는 바람에 오래 배울 수 없었다. 다른 파트들은 집에 있었던 좀 고장난 영창 K2000 건반으로 멀티트랙 레코딩이 가능한 사운드 에디터인 Cool Edit Pro에 녹음했다. 보컬은 헤드폰이 달린 PC방 마이크로 녹음했는데, 그곳에다 소리를 지르면 묘한 클리핑이 생겨서 디스토션처럼 재미있는 효과가 생겼었다.

첫 앨범은 2001년 초겨울부터 녹음했다. 소설 <태백산맥>이 가사의 레퍼런스였고 버줌Burzum, 서모닝Summoning, 새드레젼드Sad Legend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정확히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쨌든 '한국적'인 블랙메탈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런 시도가 사회적 분위기로나 밴드와 리스너들 사이에서 애국심의 일종으로 당연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인 블랙메탈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좀 창피하게 여겨져서 그만뒀지만 이제 와서는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 같은 이유는 아니고 블랙메탈이라는 장르가 지역적인 특성을 잘 섞으면 괜찮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가 들어가지 않는 4번 트랙인 '흉가에 얽힌 이야기 part 3' 을 가장 처음에 녹음했다. 그 뒤 '노인의 노래' '흉가의 끝' 등의 순서로 녹음했다. 셀러론 CPU 컴퓨터가 있었는데 음악 제작용 컴퓨터가 아니라서 느렸지만 속도가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거실에 있었기 때문에 보컬은 집에 아무도 없을 때 녹음해야만 했다. 내가 보컬을 녹음할 때 이불을 뒤집어썼다는 이야기를 봤는데 이불은 방음에 별 효과도 없기 때문에 그건 사실이 아니고, 나레이션을 속삭이는 파트를 녹음하다 엄마 목소리가 들어간 트랙이 있기는 하다. 

폐허라는 이름은 일제 강점기 동명의 잡지에서 따왔지만 잡지에 관해서는 잘 몰랐고 그냥 어감이 좋았다. 처음부터 앨범을 작정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고, 앨범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흉가라는 앨범 제목도 나중에 지었다. 시험 삼아 몇 곡을 먼저 녹음한 뒤, 가장 먼저 업로드한 프리챌의 어느 메탈 커뮤니티에서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그럼 끝까지 해봐도 되겠다 싶었다. 

이맘때에 공연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아마 처음으로 본 공연은 주신레코드에서 주관하는 2001년의 트렌드킬 페스티벌이었고, 거기서 새드 레전드와 오딘을 처음 봤다. 음악 씬의 뒷얘기야 어떻든 간에 그들은 진심이었으며 음악과 공연에 오랫동안 공들인 티가 났다. 시끄럽고 강렬해서 세상에 이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신촌 쪽의 공연장인 것으로 기억하지만 아무튼 꽤 오래 전의 일이라서 검색해도 포스터고 공연 정보고 나오지 않는다. 

CDR로 데모를 만들어서 레코드점에 직접 갖다주거나 공연장이나 음감회에서 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주로 프리챌과 다음까페의 메탈 관련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공연장에서 알게 된 Y라는 친구가 지금의 홍대 걷고싶은거리에 있었던 M레코드라는 곳에 소개했고, 앨범을 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M레코드를 찾아간 것이 여름이었으니 2002년 여름방학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