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003년에 나는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운 좋게 집 근처의 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한 학기를 다니다 자퇴했다. 먼저 자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나였지만 아무런 미래 계획 없이 그냥 막연하게 음악을 하겠노라고 했던 것 같다. 와스프 공연장에 자주 오는 동갑 친구 중에 학교를 자퇴하고 이미 밴드를 시작한 친구가 있었는데, 아마 그 친구를 보고 나도 그러면 되겠다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었고 당연히 허락받지 못했다.

막상 부모님이 자퇴를 허락한 것은 고등학교 성적이 불리하게 나올 것을 걱정해 전략적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한 것이었고, 실제로도 나는 대다수의 친구들처럼 공부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아무 생각도 없었어서 자퇴를 했다고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계획이 없어서 그랬는지 지금도 그 나이때 앞으로 뭘 하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은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퇴를 하고 바로 재수생 학원에 보내질 예정이었는데 학기중에는 자퇴생을 받는 곳이 없어서 반년 정도 놀아야 했고, 이 때 데모 <길닦음>을 녹음했다. 이 제목은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전라도 씻김굿의 길닦음에서 가져왔는데, 가사를 문학에서 가져오는 것은 블랙메탈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며 특히 톨킨 세계관에서 가사를 따온 서모닝Summoning으로부터 배워 온 것이다. 어째서 <태백산맥>이냐 하면 워낙 재미있게 읽어서 심취해 있었고 무엇보다도 메탈에 쓰이기 좋은 소재를 다루고 있으며,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에 흔한 책이었다. 어느 친구집에 가나 지리산의 빨치산을 다룬 대하소설 <태백산맥>여러 권(혹은 소설 동의보감 상, 중, 하권)이 꽂혀있었다.

이 데모는 이듬해인 2004년에 CDR 100장 정도를 제작해 몇 군데에 발매했는데, 유통하는 과정에서 레이블 없이 자체적으로 정식 발매한 것으로 알려져서 언젠가부터 그냥 정식 발매한 것으로 치기로 했다. 음악은 영화 <태백산맥> 사운드트랙인 김수철의 <산맥>에 영향받아 다소 멜로딕한 것들을 시도했는데, 영 어설펐는지 사람들 반응이 시원찮았다. 아마 첫 앨범만큼의 이야깃거리도 없고 화끈하게 지저분하지도 않아서-예컨대 트루Trve하지 않아서-실망한 모양이었다.


이 해 공연장은 자주 가지 않았지만, 여러 경로로 알게 된 친구들과 인터넷으로 교류하며 놀았다.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상냥한 리스너 아저씨가 있었는데 어떻게 알게 된 스웨덴의 동갑내기 뮤지션을 msn메신저에 초대해서 소개시켜 줬었고, 그 뒤로 가끔 수다떨고 놀았던 기억이 있다. 동네 친구들과 하는 멜로딕데스 밴드에서 기타를 친다던 친구는 국제우편으로 음원도 주고받으며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었지만 Bjorn이라는 이름이 너무 흔하기도 하고 페이스북으로 친구 관계가 넘어오지 못한 채 영영 끊기고 말았다.

버디버디 메신저의 10대 메탈 리스너 채팅방에서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놀았던 기억도 난다. 이때 만난 친구들과 여름에 아치 에너미Arch Enemy, 닐 자자Neil Zaza, 크래쉬가 출연한 2003년 부산락페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본 대형 페스티벌이었지만 공연 자체가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너무 먼 곳에서 봐서 그런지 잘 들리지도 않았고 엄청나게 덥고 습했으며 그저 최선을 다해 슬램하느라 땀을 많이 흘린 기억뿐이다.

부산에는 아무 계획도 없이 갔었기 때문에 숙소도 없이 다대포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어느 메탈 동호회 사람들과 밤새 놀다 서울로 돌아왔었다. 느슨하게 주제가 통하는 사람들과 밤새 술 마시며 노는 것이 엄청나게 피곤하지만 또 엄청나게 재밌다는 것을 이 때 처음 알았다. '완전 동안이시네, 몇 살이에요?' '17살이에요' '아 그냥 어린 거구나 엄청 어리네.' 이런 대화가 기억에 남는데, 17살이면 그렇게 놀랄 정도로 어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