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ㄷ

또래 아이들이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을 즈음 나는 재수생 학원에 보내졌다.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하루 종일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다행히 사람들도 착하고-재수생들은 기가 죽어있어서 대체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분위기가 좋아서 힘들지는 않았지만, 학원과 집을 벗어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거의 온라인에서만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온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밀림닷컴은 지금의 사운드클라우드와 비슷한 국산 뮤지션 음원 플랫폼이었는데, 무료였고 음원 업로드 무제한에, 계정도 계속해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시험해보기 좋았다. 개인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것도 아직은 꽤 흔한 일이었어서 나모 웹에디터와 wo.to 무료 도메인/제로보드를 사용해서 간단하게 '폐허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꽤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여러 가지 글들을 남기곤 했다. 나중에 밤섬해적단을 같이 하게 된 권용만도 이때 이 홈페이지 게시판과 밀림닷컴을 서로 오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이미 대학생이었을 권용만과 처음 어떻게 이야기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MP3head라는 이름으로 시끄럽고 신기한 것들을 만들어 올리던 정체불명의 창작자였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음악 밈 같은 작업들이었고 당시 듣기에 너무나 새로워서 수수께끼의 화나있는 천재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하던 3cf라는 만화 커뮤니티 활동으로 인터넷에서 이미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력을 밀림닷컴에서 드러내지는 않아서 그가 3cf의 '보노'라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다만 2004년 당시엔 만나본 적도 없어서 아직은 잘 모르는 사이였고 홈페이지와 밀림닷컴의 뮤지션 게시판에 서로 가끔 글을 남기는 정도였다. 

다크 미러 오브 트래지디 Dark Mirror ov Tragedy의 보컬 김경선씨도 이때쯤 밀림닷컴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비슷한 장르라는 인연으로 아마 밀림닷컴에서 가끔 쪽지인지 게시판 안부글인지를 주고 받다가 친해졌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원맨밴드인 모양으로 데모 곡들을 업로드하는 정도였는데 어느새 멤버를 모집했는지, 신림역 주변의 공연장 '턴 라이브 홀'에서 하는 공연을 보러 간 적도 있었다. 무대에서 본격적인 의상과 분장을 갖추고 공연에 진심으로 몰입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는데, 반면 무대 밑에서는 상냥하고 끝까지 반말을 하지 않는 메탈 뮤지션은 처음이어서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003년 겨울 동안 작업해서 2004년 초에 <Death & Decay> 라는 다크 앰비언트 데모를 만들했다. 녹음만 해놓고 영영 발매하지 못한 채 결국 음원을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만든 몇 곡이 남아 나중에 보너스 트랙으로 발매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수능 공부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에 거의 작업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직 앰비언트라는 장르는 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일렌트Elend나 아타락시아Ataraxia 같은 유럽 다크웨이브 정도를 알고 있었고, 아마 그걸 다크 앰비언트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크웨이브나 앰비언트나 사실 듣기엔 비슷해서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상관없기는 하다. 특히 일렌트의 Umbersun 앨범을 즐겨 들었었는데 메탈도 아닌 것이 사운드가 폭력적이어서 인상깊었다. 

FL Studio를 이 즈음에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영어로 된 매뉴얼을 읽지 못해 사용법을 알아내느라 꽤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예컨대 드럼 트랙을 찍는 법 까지는 알아냈지만 FL Studio에서 웨이브 녹음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드럼을 찍은 트랙을 믹스다운한 뒤 그걸 Cool Edit로 불러오는 바보같은 방법으로 작업했다. 이 때 만든 곡들을 처음 선물받은 mp3플레이어로 밖에서 신기해하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전까지는 CD에서 복사한 카세트테이프를 워크맨으로 들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만든 곡을 밖에서 들을 방법이 없었고(CDP가 없었기 때문에), mp3플레이어 덕분에 쉬워져 밖에서 내가 만든 곡을 듣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 해 기억에 남는 또 다른 만남은 평론가 나도원과의 인터뷰1)이다. 이메일로 질문과 답변을 몇 번 주고받은 뒤 신천역 주변의 도어즈라는 바에서 만나 추가적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는 진한 인상에 머리가 길고 여유 있는 말투를 사용했는데 당시 주변의 어른이라곤 평범한 '학교/학원 선생님' 뿐이었기 때문에, 특별한 어른을 만나서 이야기할수 있다는 것이 꽤 멋지게 느껴졌다. 올드락을 틀어주는 LP바에서 담배 피우면서 어른과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만으로도 마치 유명한 뮤지션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 곡 'Inside The Tomb'는 2004년 초에 작업한 다크앰비언트 트랙이다. 2011년 발매한 3집 <맞불놀이>에 보너스 트랙으로 실었다.

1) 이 인터뷰는 나도원이 후일 출간한 책 <결국, 음악>에 실려있다. 이때의 인연으로 프레시안에 서평을 실었는데, 엉망으로 쓴 것을 프레시안 측에서 많이 고쳐줬기 때문에 내가 썼다고 하기엔 좀 민망하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6418#0D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