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005년
2004년 수능을 치르고 이듬해에 대학에 들어갔다. 예비 입학생 첫 모임의 술자리 2차로 간 노래방에서 꽤 취해서 크라잉넛 노래를 불렀는데 덩치 큰 선배가 다가와서 자기가 홍대에서 인디밴드를 하고 있다고 말을 걸었다. 그는 훗날 단편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박종윤이었고, 그때 이미 '그들이 기획한' 이라는 밴드로 데뷔한 상태였다.
나도 원맨밴드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둘 다 이미 취해 있었고 반신반의하며 서로 허풍을 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외모가 인디밴드처럼 생기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밴드가 원래 외모와는 상관 없다보니 고만고만하게 생긴 사람들이 하는 것이었다. 1학년 내내 학생회 활동에 꽤 열심히 참여했기 때문에 학년 대표였던 박종윤과는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웹진 가슴'의 폐허 인터뷰에 음악이 별로라고 악플을 단 사람이었다.
학생회 행사에는 학교 본관을 점거한다든지, 데모를 나간다든지 하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아서 되도록 참여하려고 했지만, 옛날부터 내려온 NL 운동권의 집단주의 때문인지 이상한 선배들도 있었고 견딜 수 없는 문화도 많았다. 그 중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은 단체로 민중가요에 맞춰 율동을 춰야 하는 것과 술 마실 때 노래를 시키는 등 술자리 장기자랑을 하는 문화였는데 특히 후자가 끔찍하게 싫어서 결국 나중에는 이런 것을 안 시키는 모임인 영화 동아리에 가게 되었다.
이 해에는 음악 작업은 별로 하지 않았고, 술 마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노느라 바빴다. 직접 공연을 보러 다니며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박정근이라는 수수께끼의 고등학생이 만든 '비싼트로피'라는 인디 레이블 웹사이트에 자주 드나들었다. 이곳은 사실 인터넷 게시판을 활용한 커뮤니티에 가까웠고, 밀림을 통해 발매한 디지털 앨범이 대부분이었다. 해외의 펑크/메탈이 주류였고, 펑크라면 크라잉 넛과 섹스 피스톨스밖에 몰랐던 나도 여기서 네이팜 데스Napalm Death, 애널 컨트Anal Cunt, 마이너 쓰렛Minor Threat 등을 알게 되었다.
다들 이유없이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장난스러운 글이 대부분이었지만 진지하게 음원 링크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 권용만이 'Katatony Ahn카타토니 안', 'Zergillica 저질리카' 'MP3head' 등 여러 번 이름을 바꿔가면서 올린 곡들이 주목을 받았다. 지금 기준으로는 시끄럽기만 하지만 어떤 곡들의 아이디어는 당시로서는 천재적이었고 특히 가사가 뛰어났다. 놀림감을 만드는 데에 소질이 있어서 온갖 것들을 놀려먹었고 폐허의 '길닦음'도 놀려먹는다고 '밑닦음' 이라는 앨범을 만들었는데 너무 웃겨서 화도 낼 수 없었다.
어느 여름날, 권용만과 메신저로 이야기하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이야기가 나와서 그가 자취하고 있던 신촌의 '모기장'이라는 바에서 다른 친구와 셋이 만난 것이 첫 대면이었다. 그 어색한 자리에서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날 밴드를 결성해서 앨범을 내기로 하고, 권용만의 옥탑방에 가서 아무렇게나 기타를 치고 손에 잡히는 아무 책이나 펼쳐 빨리 읽는 것을 녹음했다. 밴드 이름은 '재건' 이었는데 어머니가 언젠가 내게 '폐허'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런 부정적인 이름 말고 긍정적인 이름으로 활동해라. '재건'이라든지"라는 말을 했던 일화에서 따 왔다.
몇 달 뒤 이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살롱 바다비의 평일 즉흥음악 공연 '불가사리'에서 무대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었다. 권용만이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처음 보는 병약하게 생긴 동년배의 친구들 몇 명과 함께 공연장에 있던 아무 책과 몰몬경1)을 아무데나 펴서 빠르게 읽는 것이 공연의 요지였다. 사장님은 무대 뒷편의 소파에 누워 내내 자고 있었고 우리의 공연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같이 공연한 있다itta의 음악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어서 그가 하나하나 그려서 직접 제작한 데모 CD도 사서 꽤 열심히 들었지만 언젠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도 권용만도 이것이 첫 공연이었다.2)
2004년
2003년
2002년
2002년 여름, 홍대역 부근에 위치한 M레코드에서 앨범을 정식 발매하기로 구두계약을 했다. 앨범을 내준다고 하니 기뻤지만 진짜로 좋아서 내주는건지 아직은 긴가민가 했고 사운드에도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녹음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서 재녹음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믹싱도 엉망이었으니 적어도 마스터링은 해야 되었을 텐데 마스터링조차 한 기억이 없다.
단촐한 디자인을 사용해야 사운드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C사장의 의견대로 고퀄리티의 십자 디지팩을 사용했다. 커버 내부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지만 전면의 사진이 그럭저럭 괜찮게 느껴졌다. 200장 한정으로 일일이 핸드 넘버링을 달았는데, 넘버링 인증샷이 여러 건 올라오는 등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C사장은 레이블 오너 이전에 음반 컬렉터였고, 아마 컬렉터끼리는 서로 원하는 것이 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2001년
2001년에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형의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가족이 다 같이 이사를 갔고, 나도 따라서 전학을 가는 바람에 새 학교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인지 이 해의 기억은 겨울부터 생각난다. 연초 겨울에 버줌Burzum을 처음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새로운 음악을 찾아서 듣는 청소년이 아니었다. 형이 듣던 음악을 옆에서 따라 듣고, 시디를 테이프에 복사해서 워크맨으로 듣곤 했다. 그래서 어떤 밴드들은 어떤 경로로 듣게 되었는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다. 이것도 2000년 겨울인지 2001년 겨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버줌의 3집 Hvis Lyset Tar Oss를 특히 좋아했다. 백골이 된 나그네가 길가에 누워있고 까마귀들이 그 주변을 날고 있는 회색빛 커버 그림이 아주 근사했다. 테오도로 키텔센 Theodor Kittelsen의 작품들인데, 당시엔 그림의 작가가 누군지 몰랐고 다만 앨범 자켓의 몇 안 되는 단서들을 통해 음악을 상상하며 듣기 좋았다. 뭔가를 처음 녹음한 것도 이 앨범 때문이었다. 명작이지만 단순했고 녹음 퀄리티도 조악했기 때문에, 이 정도면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다.
전학간 후 이 친구와는 연락처가 없어서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내게는 부모님을 졸라서 생긴 국산 Axtech 연습용 기타와 낙원상가에 혼자 가서 처음 구입한 중고 보스 메탈존이 있었다. 기타는 전학가기 전 동네의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서 잠시 배웠지만 가르치는 교회 형이 의욕을 잃는 바람에 오래 배울 수 없었다. 다른 파트들은 집에 있었던 좀 고장난 영창 K2000 건반으로 멀티트랙 레코딩이 가능한 사운드 에디터인 Cool Edit Pro에 녹음했다. 보컬은 헤드폰이 달린 PC방 마이크로 녹음했는데, 그곳에다 소리를 지르면 묘한 클리핑이 생겨서 디스토션처럼 재미있는 효과가 생겼었다.
첫 앨범은 2001년 초겨울부터 녹음했다. 소설 <태백산맥>이 가사의 레퍼런스였고 버줌Burzum, 서모닝Summoning, 새드레젼드Sad Legend 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 정확히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어쨌든 '한국적'인 블랙메탈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었던 것 같다. 그 때는 그런 시도가 사회적 분위기로나 밴드와 리스너들 사이에서 애국심의 일종으로 당연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인 블랙메탈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좀 창피하게 여겨져서 그만뒀지만 이제 와서는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애국심 같은 이유는 아니고 블랙메탈이라는 장르가 지역적인 특성을 잘 섞으면 괜찮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